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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중국, 사회의식 개혁시 세계 리더…미래에 동포들 큰 역할 기대” -이광규이사장 인터뷰
 작성자 |  Admin   작성일 |  2012/05/17 2:50 pm
“중국, 사회의식 개혁시 세계 리더…미래에 동포들 큰 역할 기대”
      [중국동포-한국인 20년] 이광규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이사장 인터뷰

한국 사회는 이제 재한중국동포 50만 명 시대다. 이들이 한국에 오기 시작한지도 20년이 지났지만 한국사회와의 불협화음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결혼이민자는 재판이혼 비율이 한국인의 2배를 넘어섰고, 한국인-중국동포는 단순 불화가 아닌 집단 대 집단의 대치 구도로까지 비치기도 한다.

중국동포는 100년 전에 나라를 떠나 만주지역에서 한인촌(韓人村)을 이루고 산 사람들로, 원래 다문화(多文化)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산치하에서 2, 3세대를 거치면서 ‘동방예의지국’인 한민족(韓民族)의 가치관은 점차 잊혔고, 책임감과 신뢰 부족 그리고 투쟁성향 등 여러 문제가 나타났다. 한국인 역시 중국동포 문제의 근본 원인을 모른 채 반감만 키워가며 서로 간에 간극은 갈수록 커졌다. 

“동포 1세대인 조부께서는 어른을 깎듯이 공경해야한다고 가르치시곤 했어요. 어머니도 혈통을 유지해야 한다며 절대로 한족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고요.” ―50대 재한중국동포, 여성 

“교사인 아버지는 문화혁명 때 지식인이라고 비난받은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셨어요. 저는 당시 12살이었는데 학교에서 형들이 강제로 담배를 입에 물렸어요. 문화혁명을 겪으면서 평화롭던 마을이 매일 살기(殺氣)가 감돌았습니다.” ―50대 재한중국동포, 남성 

“공산당은 조선족에게 아이를 둘만 낳게 했어요. 제가 부녀회장이었는데 이걸 감시하는 역할이었어요. 중공은 셋째를 임신하면 강제낙태를 시켰고, 자발적으로 불임수술을 하면 돈을 줬죠. 동네 사람들이 저만 보면 슬금슬금 피했는데, 이게 사는 건가 싶었어요.” ―40대 재한중국동포, 여성 

중공치하에서 60년 넘게 무신론(無神論)과 투쟁사상을 주입받았다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륙에서 조화와 화목을 기조로 한 인성(人性)이 파괴될 때 중국동포도 그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가슴 한편에는 근면함으로 대표되는 한민족의 자긍심, 그리고 동포애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본지는 중국동포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해외한인을 연구해온 이광규(李光奎·80)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이사장을 만났다. 그를 통해  타지에서 살아온 중국동포의 고충과 한민족으로 다시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봤다. 현재의 모습만으로 중국동포의 전부를 가늠하는 한국인에게도 이들을 다시 보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재외한인 연구에 주력해온 이광규 이사장은 국외에서 한민족 문화를 보존해온 중국동포의 공로를 높이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 이후 합법적인 정권이 없던 대륙에서 자치주를 확보하고 민족문화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중국동포가 노력한 결과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사진=전경림 기자)


“지금 한인촌 하면 미국 엘에이(LA)를 떠올리지만, 100년 전 이주한인들 마음의 고향은 용정이었습니다. 나라를 떠나면 목적지가 무조건 용정이었거든요.” 

이광규 이사장은 연변(延邊)조선조자치주 용정(龍井)을 언급하며 여타 한인촌과 비교할 수 없는 의미를 부여했다.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도 삶의 터전도 뺏긴 민족이 희망을 찾아 간 곳이니 그럴만했다. 

구한말 일본의 중압이 들어오자 새로운 생활터전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는 한인(韓人)이 급증했다. 1905년 외교권 상실에 이어 1910년 국권마저 빼앗기면서 토지를 잃은 농민은 물론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독립운동가도 대거 만주로 갔다. 

이주 한인은 불모지를 농토로 개간해 생활터전으로 만든 ‘개척자’이자, 무장독립운동의 주인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광복을 맞지만, 상당수 한인은 만주에 남아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비롯한 수십 개 자치 촌락을 확보하고 한민족 문화를 이어왔다. 청나라 이후 합법적 정부가 없던 대륙에서 중국동포가 일군 결과였다.

 한국인과 중국동포의 첫 만남, ‘不法’ 외국인 노동자 

중국동포는 조국을 떠난 지 100년 가까이 지나서야 한국 땅을 밟는다. 1992년 8월 24일 갑작스레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자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동포들이 친척방문 등을 명목으로 대거 방한했다가 노동시장으로 흘러든다. 그러나 중국동포와 한국인의 속마음에 ‘동포’란 개념은 없었다. 중국동포는 ‘한국은 미국의 앞잡이’ ‘한국 사회는 무질서하다’ 등 중공이 주입한 선전이 머리에 담겼고, 한국인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중국동포가 한국에 오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다. 더구나 일부 한국인 사업가가 중국에서 사기당하고, 한국에서 일하는 중국동포가 임금체불 당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서로 간에 반감이 커져갔다. 

이광규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외국인 노동자를 받을 제도적 준비나 정서적 토대가 없던 상황에서 중국동포가 밀려왔다고 설명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노동자를 일본이나 미국에 보내는 나라였지, 외국인 노동자가 와서 일하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동남아에서 노동자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중국동포가 물밀듯 온 겁니다. 친척방문 선물로 한약을 가져오기 시작하면서 한약상도 따라 들어왔지요. 서울역 앞, 시청 앞, 종로 탑골공원 등지는 저녁 무렵이면 한약 장수로 북새통이었습니다. (도시미관 정비 차) 몇 개 기업이 나서서 한약을 다 사주면서 중국동포들이 노동시장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간 겁니다.” 

3개월 여행비자로 한국에 온 중국동포들은 한국에서 조금만 일하면 중국 가서 평생 부유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눌러앉았고 ‘불법 체류자’가 됐다. 이들이 합법적으로 한국에 머물 수 있기까지 10여 년이 걸렸다. 

2001년 재외동포의 한국 내 법적 지위 보장을 위해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러나 대한민국 수립(1948년) 이전에 나간 중국동포는 대상에서 제외됐다. 국내외의 심한 반박이 있었고 결국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구절에 따라 2004년 법률이 개정(대한민국 수립 이전에 나간 동포 포함)됐고 중국동포는 합법적으로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연변 관광 한국인, “중국동포가 한국 전통 제대로 보존”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여행은 시야를 넓혀준다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 이광규 이사장은 한국인이 ‘백두산 관광’을 계기로 중국동포를 다르게 보게 됐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독립운동 거점 용정을 비롯한 연변조선족자치주, 백두산 관광이 유행했고 한국인은 직접 현지에 가서 중국동포의 생활상을 봤다. 1990년대에 여러 차례 중국에 가서 동포들의 촌락을 체험한 이광규 이사장은 “중국동포들이 우리보다 오히려 한국 전통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현지에서 이 이사장이 본 동포의 생활양식은 한국인이 잊어버린 일제 강점기 혹은 그 이전의 상태였다. “한국도 변했고 북한도 변했습니다. 6·25전쟁 통에 남한이 쑥대밭이 된 건 물론이고 북한도 달라졌지요. 그런데 그 이전 것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 연변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존한 건 언어뿐 아니라 옛 생활과 문화였어요.” 한반도처럼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지 않은 연변에 옛 생활양식이 보존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지 모른다.

 이 이사장이 가장 먼저 놀란 것은 집이었다. “농촌에 가봤더니 집이 함경도에서 들어다 옮겨놓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더군요. 해방 전 한국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초가집 그대로였습니다.” 배를 엎어놓은 것 같은 지붕은 모두 한인(韓人)의 집이었다. 한족(漢族)의 집은 널판 두 장을 맞대 놓은 것처럼 생겨 확연히 달랐다. 큰 솥이 있는 부뚜막이 온돌로 이어지는 구조도 ‘뜨끈한 아랫목’으로 대표되는 영락없는 한국식이었다. 

한복(韓服) 이야기에서는 한국인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지금 한국에서는 결혼을 할 때 어른들께 인사하거나 자녀 결혼 때만 한복을 입는 게 보편적이다. 결혼식 때는 절대 다수 신부가 전통 혼례복이 아닌 웨딩드레스를 입는다. 

그런데 동포들은 명절이나 생일잔치 또는 결혼식 등 평상일이 아니면 대부분 한복을 입는다. 결혼식 때 남자는 양복을 입지만 여자는 웨딩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입고 면사포만 쓴다. 이 이사장은 운동회 같은 단체 행사 때 여성들이 자기 팀을 한복 색으로 표시한 점도 특이했다고 설명했다. 

연변에서 본 동포들이 속마음에 있어서는 지금 한국인보다 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것 같았다고 했다. “친구나 친척이 모이면 남자는 남자들끼리 식사를 하고 놀며, 여자는 여자들끼리 식사를 하고 노는 풍속이 일반적이었다”며 젊은 층에서도 남녀가 유별했다는 것이다. 지금 국내 다문화가정에서 한국인 남편이 중국동포 아내를 두고 ‘부부관계에서 보수적이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짐작되는 부분이다. 

경로사상도 중국인 이상으로 투철해 자녀를 둔 노인은 으레 장남과 동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부모와 동거하는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했다고 한다. 

“勤勉은 한민족 특징, 미국서 ‘황색 유태인’으로 불려” 

중국동포 위주였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조선족 인구비율이 낮아지면서 자치주 지정이 해체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자치주 시작 초기인 1949년에 60%가 넘던 조선족 비율이 1992년 40%대였고, 최근에는 36%까지 낮아졌다. 2010년 기준으로 82만여 명이던 연변 자치주 조선족 인구가 2050년 50만 명을 못 넘길 것이란 전망도 있다. 재중동포 200만 명 중 50만 명이 한국에 와있고 중국 내 타 지역에 가는 경우도 많으니 일리 있는 말이다.

 이광규 이사장은 타지로 간 재중동포가 한족 학교에 다니면서 한국말은 물론 민족 정체성도 잃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동포가 한족이 주류인 중국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하는 만큼 한국어를 잊는 경우도 있지만, 중국동포들은 출세해도  조선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이사장은 지금 한인이 미국에서 ‘황색 유태인’으로 불리는 현상에 대해  언급했다. “월가를 장악한 사람들이 유태인과 한국인입니다. 4·29 LA폭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됐는데, 당시 LA에서 한국교민이 흑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 전에 유태인이 그 자리에서 당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당했어요. 한민족과 유태인은 비슷한 데가 많습니다.” 한인은 유태인과 더불어 세계적인 ‘자수성가’ 민족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중국동포도 이주 당시부터 근면함으로 자수성가했다. 다니는 곳마다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해 벼농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동북지방을 쌀 생산지로 바꿨다. 이광규 이사장은 중국동포가 성공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현상에 대해 ‘발전에 앞서가는 민족’이라고 해석했다. 

“중국동포가 한국인-중국인 가교 역할 한 건 인정해야” 

이광규 이사장은 그동안 중국동포와 한국인 간에 모순이 많았음에도, 한국인이 빠른 시간에 중국에 대거 진출해 사업할 수 있던 게 중국동포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1992년 진출 초기에는 중국 가서 사기당한 한국인, 한국 와서 임금체불 당한 중국동포가 ‘대유행’이라 서로 간에 반감이 컸다. 이후 양측이 고용에서 보다 신중을 기해 ‘거품’이 걷히면서 사기 피해도 줄었다. 

한국기업 입장에서 중국 동포는 한국인과 중국인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이었다. 동포를 중간 간부로 고용해 통역은 물론 직원 교육을 실시한 것이다. 동포의 역할로 실무가 원활해지면서 중국동포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 조선족이 10만여 명 사는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에 한국인이 지원해 조선족학교를 짓는 등 중국동포와 한국인이 힘을 합친 사례도 생겼다.

 “중국인은 경제관념 투철, 공산치하서 경제 30년 후퇴” 

이광규 이사장은 장차 중국동포가 한민족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장차 중국이 세계를 지도할 나라가 될 것이란 전망에서였다. 

“중국인은 예로부터 경제관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말라비틀어진 감자를 팔아도 저울을 써요. 그만큼 치밀한 계산을 합니다. 세계적인 거상도 많고요. 지금 한국인이 중국 가서 경제활동 성과가 있는 건 중국인이 완전히 깨어나기 이전 상태에서 잠시 누리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된 데다 문화혁명까지 하면서 30년을 후퇴했기 때문이지요.” 

이 이사장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성당(盛唐)’시기처럼 민족과 종교, 언어를 초월한 ‘개방’ 시대만 온다면 중국이 진정한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미국 가서 성공한 중국인이 많지만 본국에 가지 않고 있다”며 “마오쩌둥 이후 숱한 계급혁명으로 중국인은 맺힌 게 많고, 위정자가 탈피를 못하고 있다. 이게 중국의 고민이다”는 설명이다. 

“중국이 사회의식 개혁만 성공한다면 정말 많은 발전을 가져올 겁니다. 중국인의 근성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좀 잘 산다고 우쭐거릴 일이 아닙니다.” 

이 이사장은 미래 중국 사회를 전망하면서, 중국에 터 잡은 한민족인 중국동포의 가능성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민족은 170개국에 700만 명이 퍼져 있다. 일본인의 눈에 한국인은 ‘동포가 많으니 손발만 맞으면 어디든 뛰어가서 사업할 수 있는 민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0만 중국동포는 미래 사회의 중심이 될 새로운 중국에서 한국인의 첨병 같은 존재란 이야기다. 

“모순 해결하려면 소통부터… 만날 기회 만들어야” 

그러나 중국동포와 한국인이 ‘동포’란 이름으로 한 마음이 되기란 현재로선 쉽지 않아 보인다.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중국동포의 사유체계에 한국인은 이질감을 느끼고, 중국동포를 무시하는 한국인의 마음도 동포에게 상처를 줬다. 최근 범죄사건 발생 이후에는 ‘모든 동포를 내보내자’는 일부 과격 주장도 제기된다. 반감이 커진 상황에서 중국동포와 한국인 간에는 배타성과 투쟁심리가 커졌다. 

사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음을 열고 들어보고 상대를 존중한다면 차츰 해결될 문제일지 모른다. 문제는 거부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소통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광규 이사장은 한국인과 중국동포가 융합하기 위해서 우선 시급한 문제가 “만날 기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동포 단체와 한국인 단체가 교환이나 연합활동을 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인위적인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만나야 소통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강연회도 해서 서로에 대한 지식도 듣고요.” 

모순을 피하지 말고 대면해 소통하는 것, 어찌 보면 인간관계의 기본이다. 이 이사장은 한국인들이 동포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게 더 필요하다면서 동포와의 사이에 간극이 메워지길 희망했다.

출처 대기원 201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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