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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주변 이야기
 작성자 |  Admin   작성일 |  2011/10/06 5:50 pm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주변 이야기

                                         朴 甲 洙 (본회 이사ㆍ서울대 명예교수)

   한글 반포 565주년을 맞아 영릉(英陵)을 참배하게 되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해 주신, 민족의 성군(聖君) 세종대왕께 감사하며, 명복을 빌어야 하겠다. 그리고 영릉을 찾는 김에 자랑스러운 훈민정음의 창제와, 이에 관련된 주변의 이야기를 몇 가지 더듬어보기로 한다.

한글 창제의 동기

   이 세상에는 약 400개의 문자가 있다. 따라서 약 3,000개의 언어 가운데 75퍼센트가 문자가 없는 셈이다. 우리는 이런 귀한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차용한 것이 아닌, 독창적으로 만든 문자다. 이는 세종대왕께서 친히 창제하셔 144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훈민정음”을 통해 반포된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우리는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 문자생활을 하였다. 향찰(鄕札)ㆍ이두(吏讀)ㆍ구결(口訣)이 그것이다. 향찰은 향가를 적던 표기 수단이고, 이두는 주로 공용문서에 쓰인 것이며, 구결은 주로 한문에 조사(助詞)로 쓰인 것이다. 그런데 한자를 빌려 우리말을 적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불편한 일이었다. 이에 똑똑한 우리 민족은 한자를 배워 직접 한문을 쓰는 문자생활을 택하게 되었다. 이는 오늘날도 음훈법(音訓法)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일본(日本)과 다른 점이다. 이렇게 직접 한문을 쓰게 되고 보니 우리는 말과 글이 일치하지 않는,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의 불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글”이 창제되었다.

   한글의 창제(創製)는 보수 상류층의 반대와 명(明)나라를 의식한 나머지, 공개적인 국가사업이 아닌 궁중의 사업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이는 세종실록(世宗實錄)에 거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최만리(崔萬理) 등의 한글 창제 반대상소문을 통해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창제 당시에는 자음 17자, 모음 11자였다. 오늘날에는 이 가운데 “ㆁ, ㆆ, ㅿ, ㆍ”의 4자가 안 쓰이게 되어 자음 14자, 모음 10자가 쓰이고 있다. 글자의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이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백성”, 곧 민중의 문자라는 말이다. 한글 창제의 동기(動機)는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다.

  첫째, 나라의 체면상 문자가 있어야 하겠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愚民)으로 하여금 문자생활을 하게 해야 하겠다.

  셋째, 쉽게 배워 일용(日用)에 편하게 해야 하겠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민족(자주)정신, 애민정신, 실용정신에 바탕을 두고 창제되었다. 요(遼)의 거란문자, 금(金)의 여진문자, 몽고(蒙古)의 파스파문자의 제정도 민족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긴 하나, 애민정신, 실용정신까지 반영된 것은 못 된다. 훈민정음은 이렇게 고상하고 분명한 창제의 동기를 지닌 문자다.

자랑스러운 우리 문자, 한글

   “한글”은 자타가 인정하는 훌륭한 문자다. 이는 빈말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훌륭한 글이라는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제작자, 제작 연대, 제작 원리가 분명한 문자다. 이 상의 대부분의 문자는 대부분 그 기원을 알 수 없거나, 차용(借用)한 문자다.

   둘째, 민중의 문자다. 이는 “훈민정음”의 서문에 밝히고 있듯, 상류계층 아닌, “어리석은 백성(愚民)”을 위해 만든 것이다. 서민 대중이 쉽게 문자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자 하여 만든 것이다. 이는 뒤의 언해(諺解) 사업으로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셋째, 과학적으로 만들었다. 이는 발음기관(發音器官)을 본떠 만든 것으로, 오늘날의 언어학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자음은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의 오음(五音)으로 이루어졌다. 어금닛소리(牙音)는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ㄱ)을, 혓소리(舌音)는 혀끝이 위 잇몸에 붙는 모양(ㄴ)을 기본으로 하여 글자를 만들었다. 입술소리(脣音)는 입의 모양(ㅁ)을, 잇소리(齒音)는 이의 모양(ㅅ)을, 목구멍소리(喉音)는 목구멍의 모양(ㆁ)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었다. 그리고 소리가 강해짐에 따라 획을 더하였다. 모음의 경우도 혀를 오므리는 정도에 따라 “ㆍ, ㅡ, ㅣ” 삼재(三才) 석 자를 만들고, 이를 기본으로 하여 나머지 글자를 조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제자(製字) 원리는 오늘날 휴대전화의 문자 보내기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

   넷째, 독창적인 문자다. “한글”은 남의 글자를 이어받거나, 빌려 만든 것이 아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 발음기관을 본떠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다.

   다섯째, 배우기 쉽고 쓰기 쉽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이 다 하기 전에 깨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고 했듯, 배우기가 매우 쉽다. 그리고 획수가 적어 쓰기 또한 쉽다. 이는 한자를 머리에 떠올릴 때 쉽게 알 수 있다.

   여섯째, 음성 표기의 폭이 넓다.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비록 바람소리, 학의 울음소리, 닭의 울음소리, 개의 짖는 소리까지 다 쓸 수 있다”고 하였듯, 다양한 소리를 적을 수 있다. 그리하여 “한글”은 오늘날 문자가 없는 언어의 표기 수단으로까지 원용된다. 인도의 찌아찌아족, 남미(南美) 볼리비아의 아이마라족의 경우가 그 예다.

   일곱째, 최고의 표음문자다. 표음문자라면 일자(一字) 일음(一音)에 충실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표음문자가 일자일음(一字一音)에 충실하지 못하다. 그런데 우리 한글은 일자일음이다. 따라서 표음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 단음문자는 음절문자로 운용되는 묘를 지녔다.

   “한글”은 이와 같이 다른 문자에서 볼 수 없는 많은 장점을 지닌 훌륭한 표음문자(表音文字)다. 따라서 음성언어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 한글은 얼마든지 우수하고 훌륭한 문자라 자랑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다.

한글 창제의 배경

   한글 창제의 두드러진 동기의 하나는 민족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족적 자주정신(自主精神)이다. 이는 한자문화권(漢字文化圈)에서 벗어나 문화적으로 독립을 해야겠다는 자주정신이 발로된 것이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던 몇몇 민족은 이미 이 문화권에서 벗어나고자 민족문자를 만든 바 있다. 요(遼) 나라를 세운 거란(契丹)은 한자에 대항하여 920년 대소(大小) 거란문자를 만들었고, 금(金)나라를 세운 여진(女眞)은 1119년 대소 여진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元)나라를 세운 몽고(蒙古)는 1269년 파스파문자를 제정ㆍ반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한글 창제도 이러한 일련의 탈 한문화(脫漢文化)의 한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의 정음창제 반대상소는 이 탈 한문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최만리 등은 세종 26년 언문(諺文)을 제작한 것이 지극히 신묘하여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전함이 지극히 뛰어나나, 좁은 소견에 의심되는 것이 있다 하며 6개조를 들어 장문의 언문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 6개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과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제함으로 저들이 비난하면 사대모화(事大慕華)의 도리에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중국 본토에서는 지방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는데,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이 문자를 만든 것은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다.

   셋째, 언문의 사용은 학문을 돌보지 않게 하고, 사리판단을 못하게 할 것이니, 학문에 손해를 끼치고 정치에 이로운 것이 없는 언문의 제정은 옳지 않다.

   넷째,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 형옥(刑獄)에 공평을 기할 수 있다 하나, 형옥의 잘잘못은 초사(招辭)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옥리(獄吏)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다섯째, 일은 서두르지 말고, 공론을 거쳐 해야 하는데, 급할 것이 없는 언문 제작을 행재(行在)에서까지 급급하게 하여 성궁(聖躬)을 조섭하는 때 번거롭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섯째, 동궁(東宮)이 성학(聖學)에 잠심하여 이를 더욱 궁구하여야 하는데, 언문 제작에 날이 맞도록 때를 보내니 이는 학문을 닦는 데 손실이 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최만리를 무슨 대역죄(大逆罪)나 저지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위에 보인 바와 같이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士大夫)의 보수적인 생각을 대변한 것뿐이다.

   그리고 여기 덧붙일 것은 한글 창제자(創製者)에 대한 이야기다. 흔히는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참여하고, 세종을 보필한 것으로 일러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한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종대왕을 비롯한 동궁(東宮)과 진양대군(세조), 안평대군 등 왕자들이 참여하여 왕가사업(王家事業)으로 은밀히 진행되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世宗實錄)에 한글 창제에 관한 기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 12월 30일조에 “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是謂訓民正音”이란 기록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 정음 창제가 은밀히 진행된 것은 최만리 등의 반대상소에 보이는 바와 같이 당시 수구파 문인들의 반발이 거세고, 명(明)나라와의 유대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학사들은 창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관여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정음을 반포한 정음과 같은 이름의 책 “訓民正音” 해례본 제작에 참여한 것이다. 세종실록에 세종 28년(1446) 음력 9월 29일조에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이라 보이는 것이 이것이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정인지 서문에는 연기(年紀)가 “正統十一年 九月上澣”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한글날을 10월 9일로 정한 것은 이 정인지의 서문에 따라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우리 국자의 이름

   한글의 본래의 이름은 다 아는 바와 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이는 줄여 “정음(正音)”이라고도 한다. 글자를 창제하고 그 이름을 “글자 자(字)”자가 아닌, “소리 음(音)”자를 붙인 것은 다소 의아스러울 것이다. 이는 새로 만든 글자가 뜻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닌, 소리를 적는 기호(記號), 곧 음성 기호라 보아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문자는 훈민정음, 정음 외에 “언문(諺文), 반절(反切), 국문(國文), 한글, 아침글, 가갸글, 암글, 중글” 등 여러 가지로 일러진다. “언문”이란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는데 대해, “상말(常言)”을 적는 글자라는 뜻으로 속되게 부른는 이름이다. 이는 최만리 상소문 외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도처에 보인다. “반절(反切)”은 본래 한자의 음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한자 두 자의 음을 반씩 따서 합쳐 한자의 발음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동(東)”자의 발음을 “덕홍절(德紅切)”이라 하여 덕(德)자와 홍(紅)자의 성운(聲韻)을 합쳐 “동”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반절”로 한글도 가리킨 것이다. 이는 한글의 단음문자가 결합하여 음절문자를 이루는 것이 한자의 반절법과 비슷하기 때문에 한글의 별칭으로 전용된 것이다. “국문(國文)”은 한 나라의 공식 문자라는 말이다. 한글은 창제 후 약 450년만인 고종(高宗) 때에 와서 비로소 국자가 되었다. “국문”이란 말이 처음 쓰인 한 예는 다음과 같은 고종의 칙령에서다.

  “勅令第一號 朕裁可公文式制使之頒布...第十四條 法令勅令 總以國文爲本, 漢文附譯或混用國漢文” <고종실록 권 32. 31년 갑오, 11월 21일>

  “한글”이란 말은 우리 국자를 이르는 대표적인 말이다. 이는 개화기에 주시경(周時經)에 의해 처음 명명된 것으로 보이는 말로, 본래 한민족(韓民族)의 문자를 뜻하는 말이다. “한글”의 “한”은 “한(韓), 한족(韓族)”을 의미하는 말이며, “하늘(天), 하다(大), 하나(一)”에 이어진다. 따라서 “한글”이란 한족의 글, 큰 글, 유일한 글이란 의미라 본다. 그런데 근자에는 이 “한글”이 우리말, 곧 “한국말”을 종종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말뜻을 잘 모르고 쓰는 것이다. “국어학자”를 “한글학자”라 하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오용의 사례다.

  “아침글, 가갸글, 암글, 중글” 따위는 한글을 비유적으로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아침글”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이 다하기 전에 깨친다”고 한 말에 연유한 이름이다. 쉬운 글이란 말이다. “가갸글”은 음절표에서 한글의 배열이 “가갸거겨”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한글날”의 최초의 이름으로 1926년 “가갸날”이라 쓰이기도 하였다. “암글”은 남성들이 한자를 주로 사용하는 데 대해, 부녀자들이 한글을 많이 쓴다 하여 한글에 붙여진 이름이다. 부녀자들은 남성들이 한글을 돌보지 않고, 버려 둔 동안 내간(內簡), 고소설 읽기 등을 통해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남성들이 등용(登用)되기 위해 한문에 전념하였고, 여성들이 초서풍의 한자 자형을 간략히 익혀 히라가나를 발전시킨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일본의 히라가나는 만요 가나(萬葉假名), 구사가나(草假名), 온나데(女手)로 발전하였다. 온나데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에 공식문자로 채용되고 “고금집(古今集)” 찬진(撰進)에 채용되기에 이르렀다. 여성들이 히라가나를 지키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이를 일본에서는 “온나데(女手), 온나모지(女文字)”라 한 것이다. 우리의 “암글”이란 말과 명명의 배경이 같다. 이는 두 나라의 문자 발전의 역사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문화사적 단면이다. “중글”은 불경(佛經)을 언해諺解)하는 등 중들이 한글을 많이 쓴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 국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 가운데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여 부르는 이름은 “훈민정음, 국문, 한글”의 세 가지다.

   한글 창제와 그 주변의 이야기를 몇 가지 더듬어 보았다. 그간 우리는 세계적 문화유산이요, 국보인 우리 국자(國字)의 가치를 모르고 너무 홀대해 왔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저런 어리석은 것들이 있나?”라고,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백성(愚民)”을 얼마나 가엾이 여기셨을까 송구스럽다.

   언어(言語)의 유무가 동물과 인간을 구별한다면, 문자(文字)의 유무는 문명과 야만을 구별 짓는다. 인류의 문명은 문자에 의해 계승ㆍ발전된다. 우리는 앞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국자를 사랑하고 발전시킴으로 문화를 더욱 발전시키고,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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